사람은 보는 것을 믿을까, 믿는 것을 볼까?
같은 현실을 다르게 바라보는 마음의 비밀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판단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현실을 보고, 그다음에 생각하고, 충분히 생각한 뒤 선택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인지심리학은 그 과정이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경험과 기억, 두려움과 기대를 통해 해석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고 있는 것을 더 잘 보게 됩니다.
같은 사건을 겪고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현실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서 민수기에 나오는 열두 정탐꾼의 이야기는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같은 땅을 보고 돌아온 열두 사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있을 때, 열두 명의 정탐꾼이 그 땅을 살펴보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그들은 40일 동안 같은 땅을 걸었습니다. 같은 성읍을 보았고, 같은 주민들을 만났으며, 그 땅에서 난 풍성한 열매도 함께 보았습니다.
열두 사람 모두 가나안이 풍요로운 땅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동시에 그곳에 강한 민족과 견고한 성읍이 있다는 사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와 내린 결론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말했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너무 강합니다. 우리는 그들 앞에서 메뚜기와 같습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했습니다.
“그 땅은 매우 좋은 땅입니다. 우리가 올라가면 능히 얻을 수 있습니다.”
열 명은 위험을 보았고, 두 명은 가능성을 보았던 것일까요?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열두 사람 모두 위험과 풍요를 함께 보았습니다. 차이는 무엇을 보았느냐보다, 본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느냐에 있었습니다.
열 명에게 거대한 성벽은 ‘우리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같은 성벽은 ‘쉽지 않지만 나아가야 할 현실’이었습니다.
현실은 하나였지만, 그 현실에서 이끌어낸 미래는 서로 달랐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며 봅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과거의 경험과 지식, 기대와 신념이 현재의 지각에 영향을 주는 과정을 ‘하향식 정보 처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뇌는 카메라처럼 세상을 그대로 복사하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와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기억과 감정을 결합하여 의미를 구성합니다.
불안을 많이 경험한 사람은 낯선 표정에서 거절의 기색을 더 빨리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깊이 상처받은 사람은 평범한 말에서도 비난의 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반대로 타인을 쉽게 신뢰하는 사람은 실제 위험 신호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만이 현실을 왜곡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나친 낙관과 확신 역시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사실을 가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가진 마음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봅니다. 문제는 렌즈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렌즈를 현실 그 자체라고 믿는 데서 시작됩니다.
두려움은 왜 풍요보다 거인을 크게 보게 할까?
위험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위험 신호를 빠르게 발견하도록 돕는 중요한 감정입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긍정적인 정보보다 위협적이고 부정적인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부정성 편향’이라고 합니다.
“그 땅은 풍요롭다”는 말보다 “그곳에는 거인이 있고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 훨씬 강하게 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생존과 관련된 위협은 우리의 주의를 단숨에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위험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발견한 위험이 현실의 전부가 되어버릴 때 문제가 시작됩니다.
열 명의 정탐꾼이 본 강한 주민과 견고한 성읍은 완전한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 위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이길 수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메뚜기’로 규정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이 말에는 인간의 인지적 오류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들은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하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상대방의 판단으로 옮겨놓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가장 비관적인 결말로 확정했습니다.
사실에서 해석으로, 해석에서 확신으로 넘어가는 동안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덧붙였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인지적 오류도 대부분 완전한 거짓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진실의 일부를 현실의 전부라고 믿는 데서 시작됩니다.
사람은 믿는 것을 더 잘 봅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는 정보에는 쉽게 주목하고, 그 믿음과 어긋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작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확증편향’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위험하다고 믿으면 위험을 증명하는 사건이 더 잘 보입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믿으면 상대방의 무심한 말은 오래 기억하면서, 나를 배려했던 행동은 쉽게 지나칩니다.
반대로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지나치게 확신하면, 불편하지만 반드시 살펴야 할 경고 신호를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현실이 만들어진다”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믿음도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면 또 하나의 편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 밝게 보는 눈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크게 보고 있으며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눈입니다.
불확실성은 우리의 인식을 더욱 좁게 만듭니다
코로나 사태와 같은 거대한 위기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얼마나 크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경험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염과 죽음의 위험을 가장 크게 보았고, 어떤 사람은 고립과 생계의 위기를 더 크게 느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통제를 중요한 문제로 받아들였습니다.
각자가 처한 환경과 경험이 달랐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보이는 위험도 달랐습니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사람은 자신이 믿는 정보와 집단에 더욱 의지하기 쉽습니다. 두려움이 커지면 다른 관점을 이해할 마음의 여유도 줄어듭니다. 결국 서로 다른 위험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상대방을 무지하거나 악한 사람으로 규정하며 갈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당시의 우리 모두는 제한된 정보 속에서 현실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판단이 똑같이 옳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잘못된 정보도 있었고, 결과적으로 더 나은 선택과 그렇지 못한 선택도 있었습니다. 다만 자신의 판단을 돌아보지 않은 채 상대만 잘못 보았다고 단정하는 순간, 우리 역시 또 다른 정탐꾼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위기가 남긴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가 옳았는가?”를 넘어,
“나는 왜 그것만을 크게 보았는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삶의 현실이 됩니다
지각과 인식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마음속 생각으로만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황을 해석하는 방식은 감정을 만들고, 감정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를 넓히거나 좁힙니다.
자신을 메뚜기라고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회피와 포기가 가장 현실적인 선택처럼 보입니다. 가능성과 도움을 함께 보는 사람에게는 두려움 속에서도 한 걸음 나아가는 선택이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이 세상의 모든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질병과 상실, 가난과 폭력처럼 개인의 생각만으로 없앨 수 없는 고통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위험한 성벽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같은 현실 안에서 무엇에 주목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는 우리의 다음 현실에 분명한 영향을 줍니다.
우리는 매번 선택의 기로에 서고, 그 선택의 결과가 쌓여 삶의 일부가 됩니다.
그렇다고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선택의 결과를 경험한 뒤 우리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실패는 내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고, 관계의 아픔은 내가 반복해 온 믿음과 반응을 돌아보게 합니다.
삶은 때때로 비슷한 문제를 다른 모습으로 다시 가져옵니다. 그것은 우리를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전과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더 나은 선택을 해볼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믿음은 위험을 보지 않는 눈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은 위험을 보지 못하는 낙관주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거인을 보았고, 견고한 성벽을 보았습니다. 그들 역시 앞으로의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위험이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눈앞에 보이는 조건보다 더 큰 가능성과, 자신들을 여기까지 이끌어온 존재에 대한 신뢰를 함께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은 위험을 보지 않는 눈이 아닙니다.
위험을 보면서도 그것이 현실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눈입니다.
성숙한 영성은 현실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두렵지 않은 척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두려움을 정직하게 바라보면서, 두려움이 자신의 정체성과 미래를 모두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에서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이 글을 쓰면서 나의 몸에 대해 오랫동안 품고 있던 믿음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내게는 하나의 작은 증상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걱정하며 관련 정보를 찾아다녔고, 여러 검사를 받고 한약방과 민간요법도 찾아갔다. 그 과정에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불안해질수록 몸을 더 세심하게 살폈고, 몸을 살필수록 증상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마침내 나는 ‘역시 나는 약하고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실제로 증상도 점점 심해져 한때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요즘 나는 그 믿음을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특별히 아파서 병원에 다닌 사람이 아니었다. 건강검진 결과도 정상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약하고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니 뜻밖의 마음과 마주하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오래 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삶을 오래 이어가고 싶은 마음보다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내 안 어딘가에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그 마음이 내 증상을 만들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몸의 증상은 실제였고, 필요한 검사와 치료도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의 증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는 건강하다는 수많은 증거보다 건강하지 않다는 증거를 더 열심히 모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증거들로 ‘나는 약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점점 더 단단하게 만들어갔다.
나는 이제 그 이야기를 바꾸어보려 한다. 무조건 “나는 건강하다”고 되뇌며 몸의 신호를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돌봄은 받되, 작은 증상이 나의 몸 전체와 미래를 대신 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것이다.
어쩌면 깨어서 선택한다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사실이라고 믿어온 나의 이야기에 조용히 질문하는 것, 그리고 오늘의 몸과 삶을 이전과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나의 마음은 지금 무엇을 크게 보고 있습니까?
이 글을 쓰면서 저 역시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열 명의 정탐꾼을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쉽게 판단하면서, 정작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나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단정하지는 않았을까요?
사람은 보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믿는 것을 더 잘 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신의 확신을 지키는 힘만큼, 그 확신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바라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본 것이 사실인가?”
“그 사실에 내가 덧붙인 해석은 무엇인가?”
“두려움 때문에 지나치게 크게 보는 것은 무엇인가?”
“반대로 믿고 싶지 않아서 외면하는 사실은 없는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또 다른 가능성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언제나 완벽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감정과 믿음이 현실 전체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마음에 작은 창을 열어줍니다.
우리는 현실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렌즈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때때로 그것을 닦아볼 수는 있습니다.
더 나은 선택은 모든 것을 정확히 아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의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가나안에는 풍요로운 열매도 있고 높은 성벽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두려움이 성벽만을 보여줄 때, 잠시 멈추어 아직 보지 못한 열매도 찾아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희망에 취해 열매만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가 준비해야 할 성벽도 정직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현실을 더 온전하게 바라볼 때, 우리는 두려움이나 맹목적인 낙관이 선택해 준 길이 아니라 스스로 깨어서 선택한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심리학과 영성이 우리에게 함께 가르쳐주는 성숙한 믿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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